1. 무성영화의 역사
무성영화는 유성영화가 생기기 전 사일런트 영화라고도 한다. 소리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적으로 영화가 발전하기 전인 영화인 무성영화는 1895년에서 1927년 사이에 제작된 영화들이 대부분 무성영화이다.
무성 영화의 중기인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후반에 걸쳐서는 전세계각국의 영화가 영화 표현의 수법을 여러방면으로 모색·연구하여 제재나 표현양식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시기였다. 이탈리아에서 사극영화가 넓게 번성하여, <폼페이 최후의 날>, <쿼바디스>, <카비리아> (1913) 등에서 스펙터클 영화 분야를 확립하였고, 북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생련사련>, <영혼 불멸> 등과 같은 우수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독일에서는 <이기주의자>(1919) 등으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프랑스는 아밸 강스의 <철로의 백장미>(1923)와 같이 영상미가 아름다운 작품 탄생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 이러한 영화 예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되어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가, 감독이 계속 등장하며, 화려한 영화예술의 시작을 보이며, 이것이 사일런트 영화 후기이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수많은 작품 중 명작을 발표했다. 루이 델뤼크, 제르메느 뒬라크, 르루아르, 장 에프스탕, 페데, 클뤠르 같은 작가들 모두 명작품을 남겼다. 무르나우의 <최후의 사람>(1925), 요에 마이의 <귀향>(1928) 등에서 주로 사극 역작을 내놓았다. 클레르는 <이탈리아제 맥고 모자>(1927)로 지적인 우화영화를 시도했으며, 폐데는 <눈사태>(1925)와 <님의 모습>(1926)으로 비극적인 인간세계를 풍부한 정서로 그렸고, 에프스탕은 <아서가의 후예>(1928)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카알 드레이에르의 <심판받는 잔>(1927)은 클로즈업의 연속으로써 드라마틱한 인간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였다.
2. 무성영화의 황금기
지금의 유성영화가 되기 전 무성영화의 황금기에 대해 알아보자. 미국에는 또다른 커다란 업적이 영화예술 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피스는 작품 <국가의 탄생>(1915)과 <인톨러런스>(1916)를 만들어 미국 영화 사상 아니라 세계 영화사상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장필름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습관을 깨뜨린 이 작품은 여러면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국가의 탄생>은 영화사상 처음 보는 액션과 스펙터클한 것이었으며 <인툘러런스>는 파르타자르 왕조의 바빌론, 그리스도의 생애, 산 바르톨로메 학살, 현대의 계급간의 갈등 네 개의 에피소드를 엮은 20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만들었다.
그리피스의 뒤를 이어 대밀이 <어리석은 자의 낙원>, <십계> 대작으로 나아갔다. 유럽의 슈트로하임과 루비치가 날카로운 표현법을 들여와 할리우드 영화에 감각적인 다양함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슈트로하임의 <어리석은 아내>(1922), <그리이드>(1924)의 진지한 주구와, 루비치의 <결혼철학>, <금단의 낙원>(1924) <명랑한 파리장>(1926)의 유쾌하고 묘한 풍속 묘사가 뛰어났다.
그리피스의 영화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여허 활동사진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기법 발견되었다. 클로즈업, 몽타주 수법 같은 것이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영화표현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한편 코미디계에서는 찰리 채플린이 등장한다. 그리고 키튼, 로이드 같은 여러 희극배우들이 등장하였다. 대부분은 로스코에 아벼클의 도움을 받으면서 시작하였고 감독과 각본까지 맡았다. 이들을 MGM, 파라마운트 픽처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도왔다. 이들의 전성기는 유성, 발성 영화 시대가 도약하면서 저물어 갔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은 1931년 <시티 라이트>, 1936년 <모던 타임즈>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의 라이벌이었던 키튼이 1926년 <제네럴>을 시작으로 몰락하였다. 둘은 유성 영화가 개봉되고 약 30년 후에 찰리 채플린의 회고작인 <라임라이트>에서 조우하게된다.
무성 영화 말기의 미국 영화는 기업들과 작품의 둘사이 양면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대전으로 유럽의 영화계가 뜸한 틈을 타서 단숨에 시장을 넓혀 나갔으며, 이에 따라 상업주의가 번성하였고, 스타 시스템을 내세워 오락영화로 점차 기울어 갔다. 발렌티노, 패어뱅크스, 기시, 스완슨 등 많은 스타들을 낳았고, <포장마차>, <철마> 같은 서부극 등의 장르를 만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부터도 배우·감독을 여기저기 모아들여 전세계적인 영화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슈트로하임, 루비취를 비롯하여, 스턴버그, 모리츠 스틸러, 로타르 맨데스, 윌리엄 디텔레, 무르나우 등 감독만도 유럽에서 많고 다채롭다. 그 시기에 유럽영화가 더욱 개성이 두드러지게 강화된 것은 앞서가기 시작한다. 미국 영화가 세계의 스타, 예술가를 모으고도 그들의 개성을 살리지 못하였는데 그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의 감각적인 작품들, 이탈리아의 다양한 소재, 독일의 사회파 등과 같은 특성 중에서 각 작가, 감독 의하여 더욱 다양한 스타일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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