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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의 역사와 탄생(뤼미에르 형제)

by wwwview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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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멜리에스

1. 영화의 역사

영화의 역사는 고작 한 세기에 불과하다. 다른 예술들이 몇 백 년 몇 천년인 것에 비하면, 고작 한 세기를 조금 넘은 영화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다른 예술에 비해 대중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갔으며, 정신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예술 수단으로써 급격하게 성장해 왔다. 

 

영화는 시청각 복합체의 표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오늘날에 가장 영향력있는 대중오락 중 하나이다. 영화는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기술의 발전을 해왔고, 표현방법을 개발해 왔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상연한 것을 시발점으로 사실을 동적으로 기록하는 활동사진시대를 거쳐서 발전했다. 이후 실험영화를 만들고 다시 무성영화의 시대를 유성영화시대로, 그리고 색채영화시대로 발전하였으며, 대형 영화의 시대가 되어왔다. 

 

표현방법도 변화하였는데, 한 개의 장면을 고정촬영한 원시표현형태에서 클로즈업 수법이 구사되었고, 1915년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발표되었을 때는 원경, 대사 등을 이용하여 몽타주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영화형식을 완성된 작품으로 발전시켜 왔다.

 

2. 영화의 탄생

그리스 철학자 플라툔 《폴리테이아》 속에서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말했다. 어두운 동굴 속, 불빛에 비친 사물의 그림자를 보며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 눈을 통하여 본다는 인간의 신체구조 자체를 어둠상자의 원리에 비교한 생각은 오랫동안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화가 다빈치도 착안했었고, 16세기의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델라포르타는 '암상자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해 냈다. 18세기 중반 환등(幻燈)의 개념으로 나타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세계 각처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진기와 필름은 알려지는데 더 긴 시간이 걸렸다.

 

1757년에 I.B.베커리는 감광막에 대한 광선의 작용을 발견했다. 이때의 감광막은 은의 염화물이었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1802년에 영국 런던의 왕립학회에 제출한 각서에서 웨지우드가 사진술의 기술과 정의를 확정 지었다. 이어서 죠세프 니셰포르 니에스는 1826년에 아스팔트 감광층(感光層)에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1870년대에 피사체를 태양에 노출시키는 긴 시간의 과정이 필요없게 되는 렌즈가 나타났다. 감광체로서 젤라틴이 사용되었다. 1882년에 와서 이스트먼이 젤라틴지의 박리 필름을 사용했고, 1885년에는 셀룰로이드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영화가 발명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세 가지 요소인 환등기의 개념, 사진기의 발명, 고감도 필름은 장기간에 걸친 준비가 필요했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해 3월 22일 렌가에 있는 국민공업장러회에서 《열차의 도착》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었다.

1889년에는 미국의 발명왕인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키네토스코프는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볼 수 없도록 되어있었으며, 들여다 보는 식의 기계였는데, 이것을 스크린에 비춰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려는 연구가 동시에 행해졌다.

 

미국에서는 토머스 아메트와 프란시스 젱킨스가 바이타스코프(Vitascope)와 판타스코프(Phantascope)를 발명하였고, 독일에선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Bioskop), 오스카 메스 커의 비오폰(Bio­phon)을 발명, 영국에서는 윌리엄 폴이 에니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1896년에는 에디슨도 바이타스코프를 발표했고,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소개되었다. 이 중에는 색깔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영화의 발명은 사진에 의한 화상의 기록이나 분해사진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고안되었다. 따라서 영화는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 시대의 발명이라는 것이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영화를 대표케 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기술적으로 잘 되어 있었고, 흥행적으로도 대 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결국 이렇게 보면 현대예술의 총아인 영화는 19세기의 마지막 한밤중에서 20세기의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동시에 프랑스·미국·영국·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년 안에 전 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3. 뤼미에르 형제

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맨들을 투입하여 영화를 촬영하고 배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러시아에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은 이후 여러 영화 제작자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 중, 프랑스의 마술사 맬리에스는 영화계에 큰 업적을 남겼는데, 바로 특수효과 발견이다. 맬리에스는 영화를 찍다가 영사기가 멈추면서 우연찮게 물체가 다른 물체로 바뀌는 것을 관찰하였다. 맬리에스는 이 발견을 시작으로 <걸리버 여행기>, <달세계 여행> (1903), <불가능 세계의 여행> (1904) 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맬리에스는 에디슨의 관계자들이 영화를 복사하여 돈한푼 내지 않고 배급하였고, 이에 맬리에스는 결국 조그마한 장난감가게를 차려 겨우 살아가다 레종 도뢰르 훈장을 받고 요양원에서 말년에 살게 되었다.

포터가 다수의 영화들을 제작하면서 영화 발전을 크게 기였다. 특히 <대열차강도> (1903)은 최초의 서부영화란 칭호를 받으며 대흥행과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러면서 세계는 영화 제작에 가속하였고, 파라마운트 픽처스, MGM, 유니버설 픽처스 같은 스튜디오와 할리우드도 여럿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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